한국사
이황에 대해 2편
도학에의 정진
이황은 1501년(연산군 7) 11월 25일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에서 태어났다.
부친 이식은 본래 의성 김씨에게 장가를 들었으나, 의성 김씨는 2남 1녀를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났다. 춘천 박씨에게 다시 장가들어 아들 다섯을 두었으니, 그 막내가 바로 이황이다. 그러나 이황이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부친 이식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황의 친모 춘천 박씨는 졸지에 장가든 첫째를 빼고도 6남 1녀에 달하는 자녀들을 떠맡아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러나 박씨는 오히려 자녀들의 교육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박씨는 농사와 양잠에 힘을 써서 가세가 기울어지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공부에도 돈이 필요한 법, 근검절약하면서도 자녀들 교육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때가 되면 학비를 내어 취학을 시켜 학문을 배울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문장 뿐 아니라 특히 몸가짐과 행실을 삼가는 것 또한 중요시하였다. 과부의 자식이라 행실이 불량하다는 말을 듣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이러한 부인의 가르침 덕분일까, 이황은 예의 바르고 우애 있는 아이로 자라났다.
이황은 6살 때에 처음으로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웃 노인에게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아침이면 일어나 단정한 태도로 전날 배운 것을 외워본 후에 엎드려 가르침을 받았다. 어른을 대할 때면 항상 공손한 태도로 대하였으며, 밤중에 깊이 잠들었다가도 어른이 부르면 곧 깨어나 대답하였다고 한다. 8살 때 둘째 형이 칼에 손을 베였는데 이황이 이를 붙들고 울자, 부인이 손을 다친 형도 울지 않는데 왜 우느냐고 물었다. 이황은 이에 피가 저렇게 흐르니 왜 아프지 않겠냐고 대답하였다. 이황의 인자한 마음과 우애로움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12살부터는 숙부 이우에게 『논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하루는 이라는 글자의 뜻을 탐구하다가 이우에게 물었다. “모든 일에 있어 옳은 것이 바로 이입니까?” 이우는 이를 듣고 벌써 글의 뜻을 알았다면서 기뻐하였다. 이우는 이황과 그의 형 이해를 두고, 죽은 형이 이 두 아들을 두었으니 죽은 것이 아니라며 칭찬하였고, 또한 이황에게 가문의 미래를 이끌 것을 기대하였다.
이황은 점차 성리학에 정진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19세 때 숙부 댁에서 『성리대전』을 접하였다고 한다. 도학으로의 정진에 뜻을 두게 된 계기가 되었다. 당시 그는 성리학의 정수를 접하고서는 마음이 기쁘고 눈이 열린 느낌이었다고 술회한다. 일생 동안 추구해야 할 학문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깨달은 것이다.
23세 때 이황은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조선]에 처음 유학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기묘사화 직후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기였다. 최고 교육기관이라는 성균관마저 그 혼란함에서 피해갈 수는 없었다. 이황의 엄격한 행동거지는 찬사의 대상이 아니라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다. 선비의 기상이 땅에 떨어진 시기에는 올바른 행위도 겉치레에 불과했던 것이다. 실망한 이황은 결국 두 달 만에 성균관을 떠났으나, 서울로의 유학이 소득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후일 저명한 학자로 성장하는 김인후를 만나 교분을 나누었던 것이다. 당시 김인후는 이황을 영남의 수재로 칭송하였다고 한다.
또한 그는 이 때 『심경』이라는 또 다른 성리학의 고전을 접하였는데, 이 역시 이황의 학문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황은 33세인 1533년(중종 28)에 다시 성균관에 유학하였다. 23세 때 유학한지 10년만이었으나, 여전히 당시 성균관의 선비들은 과거를 중시하고 도학을 경시하는 풍조를 가지고 있어, 이황의 뜻과 부합하지 않는 것은 여전했다. 그러나 기풍이 조금씩 변화하고는 있었는지 진중한 언행마저 비웃음거리가 되었던 10년전 에 비해, 많은 선비들이 퇴계의 학식과 언동을 존경하며 따랐다고 한다. 이황과 같은 인물들이 시대를 조금씩 변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 해 가을 다시 고향으로 내려오면서 이황은 여주에 거주하던 김안국을 방문하였다. 김안국은 김굉필의 문인이며 기묘사림의 일원으로 활약하였던 인물이다. 이황은 그를 찾아뵌 후 비로소 정인군자의 언론을 들었다는 감회를 표출하였으니, 이황이 학문과 정치에 있어 어디에 뜻을 두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혼탁한 벼슬길에서 고군분투하다
퇴계 이황은 1534년(중종 29)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이후 49세 사직서를 제출한 시기까지 이황은 벼슬살이에서도 그 학문과 인품으로 성공한 축에 속했다. 그러나 사화가 이어지는 혼란스러운 시기였기 때문에, 이황의 벼슬길이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황은 1521년(중종 16) 21세 때 결혼한 허씨가 1527년 세상을 떠나자 1529년 안동 권씨에게 다시 장가를 들었다. 이황의 장인인 권질은 정언 권전의 형이었는데, 권전은 기묘사림으로 기묘사화 당시 파직된 후 안처겸의 옥사에 연루되어 죽었다. 이황은 승문원부정자로 있다가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으로 발탁되었는데, 당시 간관이 권력층의 사주를 받아 이황이 권질의 사위라는 것을 이유로 사관이 될 수 없다고 비난하였다. 결국 이황은 사관에 임명되지 못하였다. 이는 당시 실권자 김안로가 만나보자 청하였으나 이황이 이를 거절하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기존 권력층은 새로운 정치 질서를 대표하는 일군의 학자들을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이황은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1535년에는 호송관에 임명되어 왜노를 동래까지 이송하기도 했는데, 당시 여주의 목사로 있던 이순과 신륵사에서 노닐며 『황극경세서』와 『참동계』에 대해 논하기도 하였다.
1536년에는 호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에는 모친 박씨의 상을 당해 1539년까지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탈상한 후에는 다시 벼슬에 나아가 홍문관부수찬, 사간원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경연에 들어 수차례 임금의 행동거지에 대한 간언을 올리기도 했으며, 외척의 득세를 경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종 말 다시 정국이 혼란해지는 기미를 보였으며, 퇴계 또한 벼슬살이를 계속하려는 마음을 버리기 시작하였다.
중종과 인종이 잇따라 승하하면서 어린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대윤 일파와 소윤 일파 등 양대 외척 세력이 권력을 두고 다투기 시작하였다. 결국 을사사화가 일어나 여러 선비들이 희생되었으며, 이황 또한 을사사화를 주도한 이기의 계략으로 인해 관직이 잠시 삭탈되기도 했다. 결국 그는 외척이 들끓는 중앙 정계를 벗어나 지방에서 인재를 육성하여 이 인재들을 통해 중앙의 정치 질서를 바꾸고자 하는 원대한 기획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1548년(명종 3) 이황은 외직을 요청하여 단양군수로 부임하였다. 10월 넷째 형 이해가 충청감사로 부임하면서 상피제로 인해 풍기군수로 옮겨갔다. 지방관으로서 이황은 고을을 정성스럽게 다스리고 백성을 측은히 여겨, 정사가 청렴하고 간결하였기 때문에 아전이나 백성들이 모두 편하게 여겼다고 한다. 1549년 12월에는 백운동서원에 편액과 서적을 내려줄 것을 감사에게 청하였다. 군의 북쪽에 위치한 백운동은 고려 때의 문성공 안유가 살던 곳으로, 이전 군수 주세붕이 서원을 세워 안유를 제사하고 여러 선비들로 하여금 이곳에서 학문을 연마하도록 하였다. 이황의 요청에 감사 심통원이 조정에 보고하였고, 조정에서는 ‘소수서원’이라는 이름과 판액, 사서오경과 『성리대전』 등의 책을 내려 주었다. 조선 시대 사림 중심 정치를 대표하는 서원의 흥성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혼탁한 중앙 정계를 대신하여 지방에서 사림을 육성하고 궁극적으로 중앙 정계의 혁신까지 가져오고자 한 이황의 의도를 잘 알 수 있다.
출처 - 우리역사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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