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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이황에 대해
퇴계학, 퇴계를 연구하다
이황은 인간 심성론에 대한 연구와 강학을 통해 조선 성리학의 수준을 격상시킨 학자로 평가받는다. 기대승과의 논쟁은 조선 전역으로 파급되어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으며, 향약 제정과 서원 건립은 성리학적 정치관이 곳곳에 퍼질 수 있도록 하였다. 그의 인품과 처세 또한 동시기 여러 지식인들의 존경을 받았고 후세 학자들에게도 좋은 모범이 되었다. 또한 그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남인은 조선 후기 정치의 큰 축으로 활동하였다.

사화의 시대
퇴계 이황이 태어난 16세기 조선 정치는 사화로 인해 매우 혼란했다. 전반적으로 본다면 의리와 도학을 내세운 새로운 정치집단인 사림이 정계 전반으로 진출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정치 질서가 점차 태동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기존의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의 반발은 매우 거셌다. 이러한 반발은 결국 사림이 큰 피해를 입은 사화로 드러났다.

1498년(연산군 4) 첫 사화가 벌어졌다.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이 빌미가 되어 김종직의 문인 김일손이 사형당하고, 김굉필, 정여창 등이 처벌받았으니, 바로 무오사화이다. 1504년(연산군 10)에는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의 죽음과 관련된 자를 처벌한 갑자사화가 벌어졌다. 당시 김굉필 등이 죽음을 당하였고 연산군은 이미 죽은 이들까지 부관참시(剖棺斬屍 : 관을 파내어 시신을 참하는 형벌)하도록 명하였다. 박원종, 성희안 등은 중종반정을 일으켜, 민심을 잃은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조선]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새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사림계 인물을 대거 등용하여 정국을 일신하려 하였다. 조광조를 비롯한 기묘사림은 이 때 중용되어 소격서 혁파, 현량과 실시 등을 통해 성리학적 정치 질서를 구현하려 하였다. 그러나 반정공신 녹훈 삭제 문제로 훈구파와 크게 대립하였고 결국 1519년(중종 14) 조광조, 김식, 기준 등이 죽음을 당하였다. 이를 기묘사화라 한다. 1545년(명종 즉위)에는 명종[조선]의 외삼촌 윤원형과 인종[조선]의 외삼촌 윤임 등 외척 세력의 대립으로 을사사화가 벌어져 또다시 사림파 인물들이 해를 입었다.

성리학적 정치 질서의 실현을 위한 사림의 분투는 계속되었으나, 기존 기득권 세력의 저항 또한 만만치 않았다. 시대는 새로운 인물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무신 집안의 막내 아들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의 스승인 이황은 무신 집안에서 태어났다. 퇴계의 선대는 진보에 살았으므로 본관을 진성이라 하였다. 이황의 6대조 이석은 진보현의 아전으로 있다가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5대조 이자수는 고려조에 관직이 판전의사사에 이르렀는데, 특히 홍건적 토벌에 무공을 세워 송안군에 봉해졌다. 또한 그는 왜구의 침략을 피해서 진보에서 안동 주촌으로 이사하여 살기 시작했다. 이는 이황의 가문이 안동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된다.

이황의 고조부 이운후는 군기시부정을 지내고 사복시정에 추증되었다. 증조부 이정은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했던 무인으로, 세종대에 여진족 정벌에 큰 무공을 세웠다. 이후 한산군수, 선산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의 셋째 아들 이계양이 바로 이황의 조부로, 이황의 고향 예안현 온계리로 옮겨 온 주인공이다. 그는 소과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나, 더 이상 과거 합격에 뜻을 두지 않고 시골에 은거하여 후손을 가르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후일 이황이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강학에 몰두한 것은 그 조부에게서 물려받은 가학 전통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무신 집안에서 이황과 같은 대학자가 나올 수 있었던 것 또한 이계양의 공이 크다. 그의 두 아들은 이계양의 교육으로 인해 뛰어난 학자로 성장하였던 것이다.

이계양의 첫째아들이자 이황의 부친인 이식은 특히 학문을 좋아하였다. 공부에 전력하기를 마치 목마른 자가 물을 찾고 굶주린 자가 밥을 찾듯이 하였다. 옛것을 상고하는 데에 힘을 써 경사와 제자백가를 밤낮으로 연구하였다. 학문이 점차 증진하면서 동생 이우와 함께 학자들에게 칭송받았으며, 특히 박학다식함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황의 숙부인 이우는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좌랑, 사간원사간 등을 역임하였으며, 중종반정 당시 분의정국공신이 되었다. 이후 호조참판, 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황의 선조 중에서는 가장 높은 관직에 오른 셈이다. 또한 이우는 아버지를 일찍 여읜 이황에게는 아버지이자 스승의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했다. 대학자가 성장할 여건은 마련되어 있던 셈이다.

출처 - 우리역사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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