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v_page

한국사

이성계의 선택 2편
요동정벌의 전개와 위화도회군
1388년에 명이 철령위를 설치하고 철령 이북의 땅을 자신들의 관할로 하겠다고 고려에 통보해 왔다. 철령위 설치 소식은 명에 사신으로 가 있던 설장수를 통해 2월에 고려에 전해졌는데, 명은 이 칙서에서 고압적인 태도로 고려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으며 철령위의 설치를 일방적으로 전달하였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명에 박의중을 사신으로 보내어 철령위 설치 중지를 요청하는 한편, 성을 수리하고 장수들을 서북 변경에 파견하는 등 명과의 전쟁에 대비하였다. 또한 우왕과 최영은 몰래 요동정벌을 모의하였다. 3월에 명에서 정식으로 철령위 설치를 통고해 오자, 우왕은 요동을 정벌할 것을 결심하고 전국의 군사를 징집하였으며 자신은 최영과 함께 스스로 서해도로 나가서 요동정벌을 준비하였다. 4월 1일에 우왕은 봉주에 이르러 최영과 이성계에게 요동정벌을 위해 힘써줄 것을 당부하였다.

그러나 이성계는 이에 반대하여 요동정벌이 불가한 4가지 이유를 설명하였다. 이성계의 논지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슬러 공격하는 것은 불가하고,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불가하며, 셋째로 온 나라의 군사들이 원정에 나서면 왜적이 허점을 노려 침구할 것이고, 넷째, 장마철이라 활을 붙여놓은 아교가 녹고 대군이 전염병에 걸릴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성계는 정 요동을 공격하고자 한다면 추수가 끝난 가을철에 군사를 움직여야 한다고도 주장하였다.

이성계의 반대론이 대체로 타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왕은 요동정벌을 밀어붙여 12일에는 최영을 전군의 총사령관인 팔도도통사로, 조민수를 좌군도통사로,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았다. 조민수가 이끄는 좌군에는 서경도원수 심덕부, 부원수 이무, 양광도도원수 왕안덕, 부원수 이승원, 경상도상원수 박위, 전라도부원수 최운해, 계림원수 경의, 안동원수 최단, 조전원수 최공철, 팔도도통사조전원수 조희고·안경·왕보 등을, 이성계가 지휘하는 우군에는 안주도도원수 정지, 상원수 지용기, 부원수 황보림, 동북면부원수 이빈, 강원도부원수 구성로, 조전원수 윤호·배극렴·박영충·이화·이지란·김상·윤사덕·경보, 팔도도통사조전원수 이원계·이을진·김천장 등을 소속시켰다. 이때 동원된 병력은 좌우군이 총 38,830명, 겸군 11,634명, 말 21,682필이었는데, 대외적으로는 10만 대군이라고 했다.

5월 7일에, 이성계와 조민수가 이끄는 원정군은 압록강 가운데에 있는 섬 위화도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탈영병이 속출한데다가 장마로 인해 병장비가 손상되고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졌으며, 압록강 물이 불어 건너갈 수 없었다. 이성계와 조민수는 장마 등 현실적인 문제로 원정을 지속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철수를 요청하였으나, 우왕과 최영은 이를 거부하였다. 고려군은 진퇴양난의 지경에 빠진 것이다.

위화도에 있던 원정군의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갔다. 5월 22일에는 우군도통사 이성계가 휘하의 병력을 거느리고 고향인 동북면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좌군도통사 조민수가 달려와 “공이 떠나면 우리들은 어디로 가란 말인가.”라고 말리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에 이성계는 조민수를 비롯한 여러 장수들을 설득하여 전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도로 건너왔다. 이것이 위화도회군이다. 이성계는 회군하면서 명에 대한 사대와 백성의 안위를 천명하고 무리한 원정을 시도함으로써 상황을 그르친 최영의 처벌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위화도에서 회군할 때부터 이성계가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자신이 새로운 왕조를 개창할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는 애초부터 무모한 원정에 반대하여 몇 차례나 군대를 철수시켜 줄 것을 우왕에게 요청하였던 바 있었다. 더 이상의 원정이 어려운 상황이 어떻게든 결단을 내리도록 이성계를 몰아가고 있었다. 또한 주위 사람들도 회군을 재촉했으며, 나아가서는 이를 기회로 권력을 장악하자고 권하였다. 실제로 남은과 조인옥 등은 회군을 건의하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기까지 했다.

이성계와 조민수가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자, 성주에 있던 우왕은 원정군의 회군 소식을 듣고 급히 개경으로 돌아와서 사태에 대처하려 했다. 그러나 군사적으로 압도적인 이성계를 막을 방법이 여의치 않았다. 당시 우왕을 따르는 자가 50여 명에 지나지 않았으며, 최영이 백관에게 무기를 들고 호위하도록 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다. 반면 이성계 측에는 요동 정벌에 참여하지 않았던 동북면의 여진족들까지 참여하여 기세가 더욱 드높았다.

6월 1일에 개경에 도착한 원정군은 최영의 군사와 싸워 이를 격파하였다. 이때 최영의 군대는 분전하여 원정군의 선봉을 격파하였으나, 이성계의 본대가 공격해 오자 중과부적으로 무너졌다. 결국 승리한 원정군은 최영을 사로잡아 고봉군으로 귀양 보내고, 이후 처형하였다. 또한 우왕도 폐위하여 강화도로 귀양 보냈다. 이로써 원정군은 정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성계는 좌시중, 조민수는 우시중이 되어 최고의 지위에 올랐다.

그러나 회군에 성공한 이후, 회군을 주도한 이성계와 조민수 사이에 다시 분열이 생겨났다. 이성계 일파는 폐위한 우왕을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자손으로 간주하고, 그를 대신하여 종실에서 새로운 인물을 찾아서 왕으로 삼을 것을 주장했다. 이때 윤소종, 조인옥 등 일부 신진사대부들 역시 이성계에게 왕씨를 다시 세우도록 할 것을 청하였다.

반면 조민수는 이색과 의논하여 우왕의 아들인 창왕을 세울 것을 주장하였고, 결국 그의 뜻대로 창왕이 왕위에 올랐다. 즉 조민수, 이색 등의 구세력은 회군 이후에도 최영을 제거한 것을 제외하면 큰 변화를 주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이에 이성계 일파는 전제개혁을 주장하여 개혁에 반대하는 조민수를 유배시켜 경쟁자를 제거했으며, 다시금 창왕을 신돈의 후손이라고 주장하여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즉위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를 통해 이성계와 급진파 신진사대부들이 정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게 되었다. 이렇게 신세력이 구세력을 완전히 몰아냄으로써 위화도회군의 뒷수습이 끝나게 된다.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