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목화씨의 등장 문익점
목화가 가져 온 의생활의 혁명
문익점은 1329년에 태어나 1398년에 사망한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자 관료이다. 그는 중국에서 목화씨를 들여와 국내에서 최초로 재배에 성공한 것으로 유명하다. 여기서는 그의 생애와 행적, 특히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목화씨를 들여와 재배하는 데에 성공하게 된 사정을 추적해보고, 그에 대한 후세의 평가를 살펴보겠다.
과거에 급제하기까지
문익점의 과거급제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등과록전편』에는 그가 신미년에 출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1331년이 된다. 그의 증손인 문치창이 지은 『사실본기』 등을 모아 남평 문씨 문중에서 1819년에 편찬한 『삼우당실기』에 실린 「가전」에서도 이를 따랐다. 그러나 『태조실록』에 실린 그의 졸기에는 1398년 당시 그의 나이가 70세였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는 1329년에 태어난 것이 된다.
문익점은 진주목 강성현, 지금의 경상남도 산청 단성면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본관은 나주이다. 그의 아버지는 숙선인데, 과거에는 합격하였으나 벼슬하지 않았다고 전하며, 할아버지는 윤각으로 봉익대부 삼사우사 문한학사를, 증조부는 극검으로 검교군기감을, 외조부는 함안 조진주로 영동정을 지냈다고 한다. 남평 문씨는 고려 예종대에서 인종대에 걸쳐 활약한 문공인, 무신정권 때의 명신 문극겸 등을 거치면서 세족의 반열에 올랐다. 『삼우당실기』에는 문익점이 문극겸의 8대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문익점은 가업을 이어 독서를 하였다고 한다. 『삼우당실기』에 수록된 「가전」에 따르면 문익점은 11세인 충숙왕 복위 8년(1339)에 가정 이곡에게서 학문을 배웠다고 한다. 『가정집』에 실린 「가정선생연보」를 보면 이곡은 대체로 원나라 조정에서 관직생활을 하다가 1339년 봄에 정순대부·판전교시사·예문관제학·지제교에 임명되어 고려 조정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고려에 머물렀던 것은 이후 2년 남짓한 기간에 머물렀으므로, 문익점이 이곡에게서 학문을 배웠다는 기록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문익점은 32세가 되던 해인 1360년 문과에서 병과 제4인, 즉 33인 중 7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하였다. 당시의 과거에서 장원은 정몽주, 2등은 임박이 차지하였다.
어지러운 정세와 관직생활
문익점의 관직생활에 대해서 『태조실록』에 실린 그의 졸기에는 “공민왕 경자년에 과거에 올라 김해부사록에 임명되었으며, 계묘년에 순유박사에서 좌정언에 승진되었다”고 전한다.
문익점이 최초로 수여받은 관직인 사록은 지방관청의 7품직이다. 순유박사는 성균관의 교수직으로 관품은 종7품이며, 좌정언은 고려시대 중앙의 최고 관부였던 중서문하성에서 국왕의 명령을 심의하고 왕의 잘잘못을 논하는 낭사의 종6품 간관이다. 고려 시대의 과거 급제자는 대개 지방의 관원으로 발령받았다가 중앙 관원으로 임명받곤 하였다.
그런데 그가 관직생활을 시작했던 시기는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대였다. 당시 고려는 13세기 중엽부터 시작된 몽골제국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을 1세기 가깝게 받아오고 있었다. 고려의 국왕은 몽골 황실의 여인과 혼인하여 몽골 황실의 부마가 되었고, 동시에 고려에 설치된 원의 지방행정기구인 정동행중서성의 승상을 겸하고 있었다. 이로써 고려는 국가로서 독립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몽골제국의 일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고려의 국왕위가 원 조정의 힘에 의해 좌우되는 등 원의 정치적 영향력이 매우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또한 한 세기 동안 이어진 양국 간의 밀접한 관계에 의해 기황후나 그의 오빠인 기철과 같이 고려 국내에도 원과 깊은 관련을 가지는 정치세력들이 등장하여 국왕권을 위협하고 있었다.
1351년에 조카 충정왕의 뒤를 이어 고려국왕에 등극한 공민왕은 재위 기간 동안 원의 정치적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일련의 개혁운동을 펼쳤다. 특히 1356년에는 기철 일파 숙청 등으로 대표되는 반원개혁정치를 단행하여 원과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 또한 중국 강남지역에서 홍건적이 발흥하여 화북과 요동 일대를 휩쓸고 1359년과 1361년 두 차례에 걸쳐 고려에 침입하는 사태를 맞이하기도 하였다. 이에 공민왕은 수도 개경을 버리고 안동으로 피난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홍건적의 침입은 겨우 물리칠 수 있었지만, 이후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조정 내부의 권력 다툼이 벌어져 정세운과 안우, 김득배, 이방실 등 주요 신료들이 살해당하였고, 공민왕이 개경으로 돌아오던 도중에는 왕의 측근이자 중신이었던 김용이 일으킨 흥왕사의 난으로 공민왕이 살해당할 뻔 하기도 하였다. 문익점이 과거에 급제한 해는 바로 홍건적의 두 차례 침입 사이에 해당하는 시기였다.
홍건적의 2차 침입을 겨우 몰아낸 직후 공민왕이 안동에서 개경으로 귀환하던 도중, 원나라로부터 뜻밖의 소식이 고려에 전해졌다. 공민왕을 폐위하고 새로운 국왕으로 충선왕의 서자인 덕흥군을 옹립했다는 것이다.
이른바 덕흥군 옹립사건, 혹은 공민왕 폐위사건이 그것으로, 이는 문익점이 중국에 사신으로 파견된 상황과 밀접히 연관되므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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