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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고려시대속 척준경의 모습
칼 한 자루로 헤쳐 간 인생
척준경은 12세기의 고려 숙종~인종시대에 살았던 무장이다. 태어난 해는 미상이며 1144년에 사망하였다. 그는 여진 정벌과 이자겸의 난 등 여러 파란이 일었던 시대의 한 가운데에 칼 한 자루를 쥐고 서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의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

격동의 시대, 전쟁 영웅으로 우뚝 서다
척준경은 곡주 사람이었다. 지금의 황해도 곡산 일대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그의 선대는 곡주의 향리였다고 한다. 그 집안이 향리의 여러 위계 중 어디에 해당되었는지는 기록에 없으나, 척준경이 어렸을 때에는 집안이 가난하여 공부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 높은 위계의 향리 집안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동네의 무뢰배들과 어울리던 척준경은 서리로 들어가려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훗날 숙종으로 즉위하는 계림공의 종자로 들어갔다가 추밀원별가로 일을 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는 어쩌면 평범한 인생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무렵 고려는 격동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하얼빈 일대에 거주하던 여진 부족인 완안부가 세력을 키우며 동북아시아에 파장을 미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완안부와 고려 사이에는 수많은 여진 부족들이 거주하고 있었고, 이들의 동태는 고려에도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다. 긴장이 높아지던 1104년(숙종 9) 초, 결국 고려군과 완안부 군의 첫 교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임간이 이끌었던 고려군은 대패하여 태반이 전사하였다. 이 때 척준경은 교위 준민·덕린과 함께 적진에 돌입하여 장수 1인을 베고, 후퇴하는 길에 추격해오는 적장 2인을 활로 쏘아 죽이는 무용을 떨쳤다. 고려군은 척준경의 무공 덕분에 겨우 퇴각할 수 있었다. 이 전공으로 척준경은 천우위녹사참군사를 제수받았다.

임간에 이어 파견된 윤관마저 대패를 당하자, 숙종과 고려 조정은 본격적인 전쟁 준비에 나섰다. 별무반을 조직하여 젊은 남자들을 거의 모두 편입시키고 군사 훈련에 돌입하였다. 숙종이 승하하고 아들 예종이 즉위하는 동안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던 두 세력 간의 갈등은 1107년부터 다시 터졌다. 고려 변경에서 여진족들이 수상한 동태를 보인다는 첩보가 올라오고, 고려 조정은 격론 끝에 여진 정벌을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윤관이 다시 총 지휘를 맡아 약 17만 명의 병력을 동원한 총력전이었다. 척준경도 이 때 다시 전쟁터에 나섰다. 이른바 ‘윤관의 여진 정벌’이라 불리는 사건의 시작이다.

척준경의 무예는 이 전쟁에서 빛을 발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실린 그의 무용담은 『삼국지』에 나오는 장수들의 일화를 떠올리게 한다. 여진족이 퍼붓는 화살과 돌이 비처럼 쏟아져 고려군이 위기에 처했을 때 갑옷을 입고 방패를 든 채 적중에 돌입하여 추장 몇 명을 격살하여 전황을 역전시킨다든지, 성이 포위되자 밤에 줄에 매달려 성벽을 내려가 구원군을 이끌고 와 적군을 격파한다든지, 총사령관 윤관이 기습을 당하여 겹겹이 포위를 당하자 단독으로 그 안으로 돌입하여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텼다든지 하는 일화들이 실려 있다. 『고려사』에 척준경보다 뛰어난 무용담이 실린 장수는 이성계가 유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척준경이 이후 권력투쟁에 개입하면서 결국 반역 열전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성계는 『고려사』를 편찬한 조선의 건국자라는 점을 감안하면, 척준경의 무공에 대한 기록은 축소되었을지언정 과장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려의 여진 정벌은 대승을 거두고 9성을 축조하는 등 일시적으로 큰 성과를 이루었으나, 여진의 거센 반격과 고려측의 작전 지속 어려움 등으로 인하여 결국 빈손으로 철군하고 말았다. 여진으로부터 앞으로 고려를 적대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은 것이 성과의 전부였다. 그러나 척준경의 인생은 이 전쟁을 계기로 크게 달라졌다. 총사령관 윤관은 척준경의 구원으로 목숨을 건지고 “앞으로 자식처럼 대하겠다.”라고 울며 감사를 표하였다. 국왕 예종은 척준경의 아버지를 궁궐로 불러 위문하고 큰 상을 내렸다. 그는 고려의 전쟁 영웅으로 우뚝 섰던 것이다.

권력과의 결탁, 피바람을 일으키다
척준경은 거듭된 전공으로 승진을 거듭했고, 이후에도 승승장구하였다. 양계의 병마부사·병마사를 거쳐 1123년 12월에는 마침내 재상의 지위인 이부상서 참지정사에 올랐다. 이어 개부의동삼사 검교사도 수사공 중서시랑평장사로 승진했다가 문하시랑평장사에 임명되었다. 가난하여 공부를 할 수도 없었고, 하급 관리인 서리의 자리조차 얻을 수 없었던 젊은 날의 척준경이었다.

올곧은 무장으로 남아있었다면 지금 우리에게 척준경은 어떤 인물로 기억되고 있을까.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권력의 세계는 전쟁 영웅을 그냥 두지 않았다. 예종의 장인이자 새 국왕 인종의 외할아버지였던 당대의 중신 이자겸은 척준경의 딸과 자신의 아들을 혼인시켰다. 당시이자겸은 국왕의 권위마저 능가하는 실세였다. 척준경의 권력도 날개를 달았으나, 그 날개는 척준경을 어두운 세계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14세에 즉위한 인종은 아버지 예종 사후 다른 경쟁자를 물리치고 자신을 왕위에 올린 외할아버지 이자겸의 위세에 눌려 있었다. 이자겸도 공공연히 자신을 국왕보다 높이곤 했다. 인종은 나이를 먹으며 이러한 상황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 이러한 인종의 뜻을 눈치 챈 측근 김찬 등은 거사를 일으켜 이자겸 세력을 제거하려 시도하였다. 1126년(인종 4) 2월, 인종의 측근들은 전격적으로 공세를 취했다. 이들은 먼저 궁궐에 있던 척준경의 동생 척준신과 아들 척순을 비롯한 이자겸 세력을 죽였다. 시작은 그들에게 유리해 보였다.

하지만 이자겸의 곁에는 척준경이 있었다. 전쟁터에서 물러난 지 오래 되었으나, 여진족을 상대로 무쌍의 용맹을 떨쳤던 맹장 척준경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상황은 극적으로 반전되었다.

척준경은 소식을 듣고 즉시 일어나 불과 수십 명을 데리고 궁궐로 돌입했다. 그곳에서 그는 성 밖으로 내쳐진 동생과 아들의 주검을 목격했다. 『고려사절요』에서는 당시 그의 심정을 “恐不免”, 즉 “(자신도 이러한 상황을) 면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라고 적었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그의 심정을 잘 묘사한 것일까. 이보다는 복수심에 눈이 뒤집어졌다고 상상하는 편이 옳지 않을까.

척준경은 군기고를 털어 휘하들의 무장을 갖추었다. 이자겸 세력의 병력이 속속 궁궐 앞으로 모여들었다. 인종은 직접 성 위에 모습을 보여 상황을 수습하려는 용기를 보였으나, 척준경은 군사들을 단속하며 인종 쪽으로 화살을 날렸다. 성벽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던 상황은 척준경이 궁궐에 불을 지르면서 끝이 났다. 거센 바람을 타고 불길은 궁궐을 집어삼켰고, 인종과 측근들은 궁에서 나와 이자겸세력에게 잡혔다. 이른바 ‘이자겸의 난’이 벌어진 것이다. 인종의 측근들은 처참하게 살육당했고, 인종도 이자겸에 의해 유폐되다시피 하였다. 이자겸과 척준경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권력은 나누기 어렵다고 한다. 인종과 아직 살아남았던 그의 측근들도 이 점을 알았기 때문일까. 이들은 이자겸과 척준경을 갈라놓으려 공작을 시작하였다. 내의 최사전이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국왕의 힘이 되어달라는 이들의 설득에 척준경은 점점 설득되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뜻밖의 사고가 터졌다. 이자겸의 아들 이지언의 노비가 척준경의 노비와 다투다가 “너의 주인은 저위에 활을 쏘고 궁궐을 불태웠으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하다. 너 또한 관노로 적몰되어야 마땅한데 어찌 나에게 모욕을 주느냐?”라는 말을 내뱉은 것이다. 이 말은 척준경의 귀에 들어갔고, 척준경은 크게 분노했다. 결국 척준경은 왕의 뜻에 따라 이자겸 세력을 제거하였다. ‘이자겸의 난’이 벌어진 지 불과 몇 달 뒤의 일이었다.

출처 - 우리역사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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