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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발해 건국!
건국 과정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은 고구려의 민들을 강제로 당으로 이주시켰다. 당은 고구려의 유력한 지배층들을 당 내지의 빈 땅으로 옮겨 그들의 인적, 물적 기반을 철저히 파괴하였다. 발해의 건국 주역들이 당의 영주 지금의 요령성 조양 지역에서 처음 일어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였다. 696년 5월, 영주에서는 거란족 추장 이진충이 당의 지배에 저항하며 영주도독 조문홰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진충은 스스로를 가한이라 불렀다. 당은 즉시 조인사, 장현우, 이다조, 마인절 등 28명의 장군을 보내 토벌하게 하였다. 당은 이진충의 이름을 이진멸로, 손만영의 이름은 손만참으로 바꾸는 등 적개심을 드러냈으나 9월이 되도록 성과는 없었고 오히려 이들에게 계속 패배하며 수세에 몰리는 상황이었다. 영주 지역은 당의 통제가 불가능한 혼란한 상황이 되었고 이 틈을 타 이곳에 강제로 옮겨졌던 고구려 유민을 비롯하여 거란족, 해족, 말갈족 등은 탈출을 시도하였다. 대조영의 아버지인 걸걸중상이 이끄는 집단과 걸사비우가 이끄는 집단은 이때 영주를 빠져나와 함께 동쪽으로 이동을 시작하였다.

당이 거란의 공격을 막는데 집중하면서 걸걸중상 집단과 걸사비우 집단은 초반에는 비교적 안전하게 동쪽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당도 거란을 막는데 집중하였으므로 이들의 동향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못했던 것 같다. 이들이 요해처를 마련하여 성벽을 쌓고 방어 체계를 공고하게 만들어 나가자 당은 걸걸중상에게 진국공을, 걸사비우에게는 허국공에 봉하며 회유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걸걸중상과 걸사비우는 다시 당의 지배 아래 들어갈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자 당은 우록금위대장군 이해고를 보내어 이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이해고와의 교전 중에 걸사비우가 죽자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과 말갈의 무리를 통솔하여 천문령( 송화강의 지류인 휘발하와 혼하가 나뉘는 지점으로 합달령으로 추정됨)을 넘었다. 이 천문령 부근에서 대조영의 군사와 이해고가 이끄는 당군이 일전을 치뤘다. 이 전투에서 이해고만 탈출하여 돌아왔다고 기록할 정도로 당군은 크게 패배하였다. 돌궐은 요동 지역에 대한 당의 통제력이 약화된 틈을 타 세력을 확장하고 거란과 해에 대하여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대조영도 이러한 가운데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동쪽으로 더 이동하여 계루부(여기서는 고구려를 의미)의 옛 땅을 차지하고 동모산에 도읍을 정하였다.

동모산은 지금의 길림성 돈화시에 위치한 성산자산성으로, 『구당서』와 『신당서』에는 동모산이 영주로부터 2,000리 떨어진 곳이라고 되어 있다. 대조영 세력은 영주로부터 2,000리나 되는 긴 여정을 당군과 싸우면서 이동하였고 동모산에 이르러 698년 진국을 건국한 것이다. 그런데 698년 대조영이 세운 국가의 국호가 여러 가지로 기록되어 있다. 『구당서』에서는 대조영이 진국왕이 되었다고 기록하였고 『책부원구』 에서도 대조영이 세운 국가를 진국으로 기록하였다. 한편 최치원도 발해의 국호를 진국으로 기록하고 있다. 『신당서』에서는 진국왕으로 기록하였다. 또한 『삼국유사』가 인용한 『통전』에서는 진단이라고 하였다.

이 중에서 진국은 무측천이 걸걸중상을 진국공에 봉하였다는 기사에서 그대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최치원이 당에서 일어난 발해와 신라의 쟁장사건에서 당이 신라의 손을 들어준 것을 감사한 표문에서 발해를 진국이라고 칭하고 있으므로 발해가 존속한 동시기의 신라의 기록에 적힌 진국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진국에서 발해로 국호를 바꾸는 것은 713년의 일이다.

출처 - 우리역사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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