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신민회 105인 사건
일제는 왜 105인 사건을 조작·날조하였을까?
105인 사건은 1911년 조선총독부 초대 총독인 데라우치 마사다케를 암살하려다 실패에 그친 사건을 일컫는다. 그러나 사실 이 사건은 당시 국내 최대의 비밀결사 조직이었던 신민회를 뿌리 뽑기 위해 일제가 조작한 것일 뿐, 총독 암살계획은 근거가 없는 허위 날조였다. 그렇다면 왜 일제는 105인 사건을 기획·조작하였을까?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구한국군 해산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의병전쟁이 일어나자, 일제는 1909년 9월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을 벌여 2개월간 6만여 명에 달하는 의병들을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의병들은 국내에서는 더 이상 항일 투쟁을 할 공간이 없음을 깨닫고 국외로 망명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지속하였다. 한편, 일제는 의병세력과 함께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던 또 다른 한 축인 애국계몽운동 단체를 탄압하기 위해 1907년 8월부터 1910년까지 신문지법·사립학교령·학회령·출판법·보안법 등을 제정하여 애국계몽운동 단체의 활동을 사실상 묶어 놓았다.
1910년 8월 일제는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삼으면서 식민지 통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국내의 모든 운동단체를 발본색원하려 하였다. 그러던 중, 1910년 11월 안명근이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황해도 신천에서 체포되었다. 일제는 이 사건을 조작하여 황해도 일대 민족운동가 160여 명을 체포하였다. 이 사건이 이른바 안악사건 이다. 또한 1911년 1월에는 양기탁 등의 보안법위반사건을 계기로 서울의 민족운동가 다수를 체포함으로써 사실상 국내 항일운동세력 제거에 힘을 쏟았다. 따라서 국내에는 안창호 등이 비밀결사 형태로 조직한 신민회만이 남게 되었다.
한편, 경무총감부 경시이자 평양경찰서 서장이었던 쿠니토모 쇼캔은 이즈음 신민회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주시하고 있었다. 신민회는 기독교와 평안도 지역이라는 공통점 외에도 미주의 대한인국민회와도 관련을 갖고 있었다. 이에 일제는 신민회 세력을 완전 제거하기 위한 방편으로 105인 사건을 기획·조작하고자 하였다. 여기에는 일제의 종교정책에 반대하는 미국 선교사까지 축출하기 위한 속셈도 함께 깔려 있었다.
재판과정에서 드러난 사건의 진상
체포된 지 9개월이 지난 1912년 6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105인 사건 관련 재판이 열렸다. 당시 기소된 사람은 123명인 까닭에 이들을 모두 재판정에 세울 수 없게 되자, 일제는 재판장 확대공사까지 했다.
첫 공판일 오전은 기소자가 123명이나 되는 탓에 이들의 신상 확인과 검사의 기소장 낭독으로 마쳤다. 오후에 다시 시작된 공판은 2시 30분부터 개별 신문에 들어갔다. 그중 제일 먼저 신문을 받은 사람은 신성중학교 체육교사 신효범이었다. 그런데 이 신효범의 첫 신문은 105인 사건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재판장 : 총독 암살을 주도한 것이 신민회의 목적이며 이 단체의 회장이 윤치호인가?
신효범 : 전혀 아는 바 없다
재판장 : 그러면 왜 경찰 신문과 검사정에서 이 모든 사실을 시인했는가?
신효범 : 그것은 경찰의 가혹한 고문 때문이었다.
신효범은 당시 자행된 잔인한 고문 사례를 일일이 나열하면서 일제 경찰의 잔혹한 고문을 폭로하였다. 이러한 그의 태도로 인해 이후 진행된 피의자 신문에서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혹한 고문을 견딜 수 없어 경찰과 검사의 신문과정에서 허위사실을 인정하였다고 진술하였다. 관련자들은 재판정에서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이었음을 계속해서 항변하였으나, 이를 입증할 결정적 증거가 없던 관계로 재판은 불리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안태국의 진술로 사건의 허구성이 낱낱이 드러났다. 즉 안태국의 기소장에는 안태국이 총독암살을 실행하기 전날인 1910년 12월 26일 평양에서 하루를 머문 뒤, 27일 새벽 정주에서 60여 명의 동지를 인솔하여 선천역으로 갔다고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기소장 내용은 곧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안태국은 12월 26일 밤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양기탁·이승훈·유동열 등 7인을 위로하기 위한 모임을 서울 명월관에서 주선하였고, 다음 날인 27일 서울 광화문우체국에서 평양의 윤성운에게 보낸 전보문을 보냈다고 하면서 요리대금 영수증과 전보문을 증거물로 제출하게 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이 요리대금 영수증과 전보문 등 명확한 증거물이 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심 재판부는 21회에 걸쳐 공판을 진행한 끝에 1912년 9월 기소된 123명 중 18인을 제외한 105인에게 유죄판결을 선고하였다. 윤치호·양기탁·임치정·이승훈·안태국·유동열 등 지도급 인사 6명에게는 징역 10년, 옥관빈 등 18명에게는 징역 8년, 이덕환 등 39인에게는 징역 6년, 오대영 등 42명에게는 징역 5년형을 선고하였다. 1심 판결에 불복한 105인은 상급 법원인 경성복심법원에 상고하였다. 4개월여에 걸쳐 52회의 공판 끝에 1913년 3월 2심 재판부는 양기탁 등 지도급 인사 6인을 제외한 99명에게 무죄를 선고하였다. 이에 양기탁 등 지도급 인사 6인은 고등법원(현재의 대법원에 해당)에 상고한 끝에 1913년 10월 최종심에서 재판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일제는 그들을 곧바로 풀어주지 않고 1915년 2월에야 ‘특별사면’ 형식으로 사면하였다. 이것으로 105인 사건은 종결되었다.
105인 사건을 무죄로 이끌어 낸 데에는 외국인 선교사들의 적극적인 협조도 큰 역할을 하였다. 이때까지 일제의 종교정책과 마찰을 빚던 외국인 선교사들은 이 사건 관련자 대부분이 기독교인이라는 점에서 이 사건을 일제의 대대적인 기독교 탄압사건으로 인식하였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105인 사건의 전모를 본국 선교본부와 각국 언론, 미국정부에 알리는 한편, 대규모의 변호인단을 구성하여 재판에 적극 대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노력 덕분에 세계 언론은 이 사건을 주목하게 되었고, 일제의 음모를 전 세계에 폭로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출처 -우리 역사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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