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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맞서싸운 계백!
계백의 중용
계백은 660년 전투 이전의 기록에 이름이 나오지 않는 남자이다. 계백 관련하여 삼국사기와 계열백전에는 가족과 배경에 대한 언급 없이 그가 벼슬에서 달솔 되었다는 기록만 있습니다. 삼국 사기와 백제본기에서는 그의 활동이 660년 신라와의 전투에서만 드러났고, 그 이전에 그가 정치적이나 군사적으로 중요한 단서를 찾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자왕은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전투에서 계백을 중용 했고, 계백은 수적으로 열세일 때 신라군을 일시적으로 저지하는 등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계백이라는 사람의 갑작스러운 등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백제의 내부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재위 초기에 의자왕은 신라를 맹렬히 공격하고 대야성을 비롯한 여러 곳을 점령하고 영토를 확장하고 당의 대외관계 안정을 위한 공물을 바쳤다. 그러나 655년 이후 의자왕은 실정을 하였으며 노골적인 발언을 하던 성충은 감옥에 갇혔고, 그의 41명의 서자들은 이름이 백제 고위 관료인 좌평이었으며 정치를 파행적으로 운영하였다. 또한 성충이 죽기 전에 장차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하여 기벌포와 침현을 지켜야 한다는 글을 올렸지만 의자왕은 그것을 읽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성충이 예견한 대로 당나라와 신라의 군대가 백제를 공격했고 의자왕은 궁중 관리들과 방어 전략을 논의했다. 그러나 당나라를 먼저 제지하자는 좌평 의직과 신라군을 먼저 처치하자는 달솔상영은 반대했다. 동시에 백제는 신라군이 탄현을 통과하면서 지리적 이점을 포기했다.

계백의 이름이 거론되자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의자왕은 신라의 군대를 막기 위해 5,000명의 병사를 황산으로 보냈다. 의자왕대 신라전쟁에 참전한 인물은 윤충, 의직, 은상이다. 그 중 윤충은 대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존엄을 위태롭게 하는 위급한 상황에서 의자왕은 활동하지 않았던 계백에게 중책을 맡겼다.

이런 점에서 계백은 성충, 홍수처럼 나라를 위한 마음과 능력만 있으면 누구에게나 인정받을 수 있는 위대한 장군이지만, 정치적 갈등 때문에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중요한 인물. 경계하고 소외되었던 인물이지만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그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계백은 이미 늦어버렸다.

가족을 죽인 그
삼국사기와 계백열전 에는 의자왕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계백이 집으로 돌아와 온 가족을 죽이고 출정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계백은 “나라의 존재를 알 수 없는 것은 당나라와 신라의 막강한 세력과 맞서야 하기 때문이다. 아내와 아이들이 사로잡혀 노예가 될 수도, 모욕을 당하는 것보다 기꺼이 죽는 것이 낫다. 계백은 이제 적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계백이 가족을 죽인 것 관련하여 고려 말, 조선 초기 문신권근은 『삼국사절요』에서 계백이 가족을 죽였다고 말했고, 가족을 죽인 이유가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되었고, 이미 스스로를 패배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렸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권근의 평가는 동국통감에서 이미 모두가 백제가 멸망할 것을 알고 있었고, 계백이 가족을 죽인 행동이 도를 벗어난 것일지는 모르나 그는 과감하게 앞으로 나아간 것이다. 패배한 후에도 절개가 눈에 띄기 때문에 권근의 생각이 과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동사강목』의 안정복은 계백의 행동을 단호하게 옹호했다. 계백은 가족이 모욕당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가족을 죽임으로써 군인들이 자신의 결정을 위해 싸우는 결단을 보여주는 모범이 되었다. 가족을 생각하며 제 몸 살고자 하는 마음 대신 결사항전의 각오를 병사들에게 본보기로 보여 사기를 진작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황산벌 전장
가족을 죽이고 5,000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출발한 계백은 황산 북쪽에서 50,000명의 신라 병사를 만났다. 성충과 홍수가 지적했듯이 신라군의 공격을 방어하기 가장 좋은 곳은 신라에서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으로 가는 길에 있는 천현이었다. 그러나 신라군은 이미 참현을 통과했고, 계백은 전장에서 신라의 대군을 저지하기 위해 적은 병력을 동원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계백은 황산벌에 도착한 후 험한 곳을 선택하여 신라 군대를 위해 세 개의 진영을 설치했습니다. 수적으로 불리한 계백으로는 방어하기 위해 지형을 사용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계백은, 상영, 충상은 함께 원정을 나갔고, 세 사람이 각각 하나의 진영을 잡고 신라군과 싸웠다. 신라군을 이끈 김유신은 병사들을 3군으로 나누어 계백의 진영을 공격했지만 백제군을 제압하지 못하고 연이은 패배를 당했다. 이때 계백은 5000명의 군대로 70만 명의 오군을 무찌른 월왕 구천의 전투를 참고하여 병사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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