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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살수대첩
양제의 진격
612년, 양제는 1,133,800명의 군대와 군량 운반자가 실린 배를 이끌고 직접 고구려에 맞서 싸웠다. 그 후 그는 고구려의 현 영토가 원래 중국 땅이고 고구려가 거란과 말갈의 일부를 흡수한다는 칙령을 내렸습니다. 그는 수나라가 고구려에 간 이유를 다른 나라의 길을 막고 고구려의 세금이 많고 백성들이 흉년과 기근에 시달렸다는 이유를 밝혔습니다.

2월에 유수에 도착했을 때, 양제가 공부상서 우문개에게 강을 건너기 위해 부교를 건설하도록 명령했지만 부교가 짧았고 고구려 군대가 기회를 노리고 공격했다. 다시 소부감 하조에게 다리를 뻗고 요하를 건너 고구려 군을 무찌를 것을 명했다. 그 결과 요동성 지역에 체류하면서 전진하지 못했다.

양제는 군의 진격을 자신에게 보고하고 그의 결정에 복종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수군이 신속하게 대응하고 전쟁을 처리하기 어려웠다. 이에 대해 고구려는 모든 것을 결정한 지휘계통을 역이용하였다. 수군이 양계의 명령을 기다리는 동안 고구려 군은 전선을 배치하고 방어체계를 완비하여 요동성도 수군에게 쉽게 함락될 수 없었다. 수군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양제는 기량을 강화하고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네가 죽음을 두려워하여 전력을 다하지 못하니 내가 너를 죽일 수 없느냐”라고 말했다.

수의 지휘부 분열
결국 수의 군대는 전투 방식을 바꿔 해군과 군대를 이끌고 평양으로 진군하기로 했다. 첫째, 좌익위대장군의 내호아는 해군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평양까지 60리까지 진격했다. 도법에 따르면 부사령관은 군대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공격하겠다고 말했다. 고구려군은 누명을 쓰고 수군을 유인하여 공격했지만 살아남은 사람은 몇 천 명에 불과했다.
육군은 9군으로 나누어 좌익위대장군 우문술은 부여도, 우익위대장군 우중문은 낙랑도, 좌효위대장군 형원항은 요동도, 우익위장군 설세웅은 옥저도, 좌둔위대장군 신세웅은 현도도, 우어위대장군 장근은 양평도, 우무후장군 조효재는 갈석도, 탁군태수 검교좌무위장군 최홍승은 수성도, 검교우어위호분낭장 위문승은 증지도로 향하여 모두 압록강 서쪽에 모였다. 긴 원정로를 통과하면서 군사들은 지쳤고, 미리 지급받은 군량이나 무기류 등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급기야 몰래 군량을 버리는 자들도 많이 생겨나 중도에 군량은 이미 바닥이 난 상태였다.

허를 찌른 살수에서의 전투
수군은 고구려 군과 하루에 일곱 번씩 싸워서 일곱 번 모두 이겼지만, 이것은 을지문덕의 고의적인 패배였다. 군사력이 부족한 병사들은 전투 횟수가 늘어남에 따라 육체적, 정신적으로 지쳐갔다. 이때 을지문덕이 유정에게 시를 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령한 계책은 천문을 다하였고,
신묘한 계산은 지리를 다하였다.
싸움에 이긴 공이 이미 높으니,
만족을 알고 그만두기를 바란다.
을지문덕은 우중문을 축하하는 척하며 군대의 퇴각을 격려하는 시를 보낸다. 또 다른 전령이 우문술에 보내어 다시 항복하고 수군이 물러나면 영양왕과 함께 황제를 만나겠다고 하였다. 우문술은 평양의 방어가 튼튼하고 지친 병사들 사이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해 을지문덕의 항복을 구실로 귀환을 결정했다. 그러나 느닷없이 고구려 군이 쳐들어올지도 모른다는 공격에 대비하여 사방에서 적을 수호하는 방진의 대형을 결성하여 후퇴하였다. 7월에 수군은 살수에 상륙했고, 수군이 강을 건너자 미리 숨어 있던 고구려 군이 반격했다. 9군 정예병력 30만 5000명 중 2700명만이 요동으로 귀환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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